35대 황극천황 642년–645년, 37대 제명 655년–661년 ㅁ 일본왕조계보

35皇極황극 천황 642645, 655661

아메토요 타카라이 카시히타라시 히메노 스메라미코토

(天豊財重日足姫尊)

  
  

me 친아들인 황자가 2명이나 있는데 왜 황극이 왕이 되었나?

 

 

원년(642년, 의자왕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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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然其國者今大亂矣

[삼국사기] 6413월에 무왕이 돌아가셨다고 나온다. 의자왕이 즉위했고, 당이 주국대방군왕백제왕이란 책명을 내렸다는 말 밖에 없다. 그리곤, 의자왕이 해동증자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는 백제에서 대란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는 의자왕의 즉위가 평탄한 즉위가 아니고 우연히 그 다음해 발생한 고구려의 쿠데타와 같은 왕위계승전이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일 것이다.

 

일도안사란 별칭을 쓰시는 것 같다. 백제 왕자 교기의 왜로의 망명에 관한 아래 글은 읽을 만하다. 한일통합 백제 의자왕{一道安士} [김상__1, 403-404] 6421월이 무왕의 황후인 보황녀가 왜로 건너간 해라고 한다.

 

[일본서기]금년정월 國主母薨 又弟王子兒翹岐及其母妹女子四人, 內佐平岐味, 有高名之人卌餘, 被放於嶋

[동북아__3, 136] 의자왕이 정적을 우호관계에 있던 왜국으로 추방했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본문의 추방설은 풍설에 불과하고 이들은 외교사절로서 파견된 인물들이다.

 

me 은유적인 표현도 아니고 이렇게 직접적인 표현을 교기가 외교사절로서 왜로 온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그 후의 교기의 행보와도 맞지 않고, 삼국사기에 나와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 사실을 풍설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은 매우 이상한 해석이다. 오히려, 백제사신이 왜왕 앞에서 교기 등의 귀족이 섬으로 추방되었다고 하는 유체이탈화법을 쓴다는 것도 이상하다. 따라서, 이때 교기가 추방된 섬은 일본열도 4개섬의 어디가 아닌 대마도나 다른 섬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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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戌, 召翹岐安置於阿曇山背連家.

일본서기에서 날짜까지 나오는 교기의 안치기록. ‘안치라는 글자를 외교사절이 잠깐 머무는 일에도 사용한 것인지는 무식해서 잘 모르겠다. 여러 모로 보아 의자왕과 다른 무왕의 아들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있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이런 점에서 동북아재단이라는 국가재단에서 펴낸 일본서기 해설서가 교기의 망명을 풍설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은, 그것도 삼국사기에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 것은 매우 모순되고 이상하다.

이때는 이미 풍장이 야마토에 있을 때다. 풍장과 교기의 관계는? 
풍장은 661년에 백제로 들어오는데 그럼 그때 그의 나이는? 의자왕의 아들이라면  그의 자식 중 하나인 부여융이 615년생이라고 하므로 (부여융묘지명 ) 위키백과에서는 의자왕이 595년경에 태어났을 것이라고 한다. 그럼 융이 장자라면 풍은 차자 정도라고 해도 615 ~620년 사이 태생이면 왜에 건너갈 때 10대, 다시 본국으로 올 때 40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왜의 총독으로 가기에는 나이가 어리지 않나?

풍은 조부 때에 왜로 간다. 인질로 아들이 아닌 손자를 보내는 경우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만일 풍이 무왕의 아들이고 의자왕의 배다른 형제라면? 추론이 가능할 수 있겠다. 근거는?

   




645년

6月
12日 蘇我入鹿暗殺 을사의 변 乙巳の変, いっしのへん

쇼오토쿠타이시가 죽은 후 그이 아들 야마시로노오오에에를 중심으로 우쯔노미야 왕가에 의해 이카루가의 기반은 계승되고 잇었으나 소가 씨와의 정권다툼으로 일어난 코오교쿠천황 2년(643) 이카루가궁 습격에 의해 우쯔노미야 왕가는 멸망. .

쇼토쿠 태자는 도요토미미 豊聰耳, 스이코 천황의 시호는 도요미케카시키야히메 豊御食炊屋姬, 스이코推古 천황의 형인 요메이用明 천황의 이름인 다치바나노도요히노미코토 橘豊曰尊 에도 '도요'가 붙는다.

스이코 천황의 궁은 아스카의 도유라노미야 豊浦宮 인데 이것은 도요의 항구에 있는 궁궐이라는 뜻. 진구 황후의 궁궐명과 완전히 같다[세키 유지, 고대사, 241쪽 이하]

소가 가문의 실권자인 이루카 入鹿,  에미시 蝦夷, 우마코의 이름이 동물이나 오랑캐 명칭인 것 역시 소가가문을 악인으로 만들려는 시도였다고 본다.

me 蘇我一族の長老・蘇我倉山田石川麻呂 소아창산전석천마려(そがのくらのやまだのいしかわまろ)를 나가토미 中臣와 中大兄이 끌어들였다고 되어 있다. 소외되어 있던 소가 씨 일족이 쿠데타에 참여했는데 소가 씨가 멸명했다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거 같다. 그 이후 소아창산전석천마려의 후손들에 대하여 나오는 것은 없을까.

 


고창 ㅁ 국내 여행

봉덕리 고분
5세기 초 추정. 백제 영토 내 최대급
다장형식


천안 ㅁ 국내 여행

용원리 고분군

4세기 중반 ~ 5세기 전반 
150여기 고분
청담동과 화성리 일대에도 고분군 존재



20대 비유왕(毗有王, ? ~ 455년 재위 : 427 ~ 455 ㅁ 백제왕조계보

20대 비유왕(毗有王, ? ~  455년 재위 : 427 ~ 455 

3년(429)

[삼국사기 백제본기]
추견사입당조공

[남사 권2 송본기중제2 문제 원희 6년]
7월 백제국견사조공

4년(430년)

책봉관련 기사

[삼국사기 백제본기] 하사월 송문황제이왕복수직공 降사책수선왕영작호
[책부원귀 권963 외신부 책봉 원희 7년] 시년 백제왕여비 餘毗 복수직공 이여영 餘映작호수지





30대 문무왕 ㅁ 신라왕조계보


30대 문무왕


신라문무대왕릉비

 

5행의 판독이라고 한다. 이마니시 류 今西龍의 판독 이후 다른 판독은 없는 것일까


君靈源自敻繼昌基於火官之后峻構方隆由是克  枝載生英異秺侯祭天之胤傳七葉以

투후 김일제는 bc134 86 인물이라고 한다.


역사추적 2부작 문무왕 비문의 비밀



문무왕비문과 다른 왕의 비문이 가짜가 아니라면 역사책의 서술도 바뀌어야 하고 족보도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족보야 전적으로 공공의 기록은 아니니 그 집안이 알아서 할 일이기는 하다.) 흉노 등 북방민족을 업수이 여기고 소중화를 자처하며 족보를 작성한 게 몇 백년 되지도 않는데 이런 명백한 사실이 있는데도 역사책의 내용이 바뀌지 않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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